[COVER STORY] 정재영
정재영
진실되게 그 영화에 녹아들어서
같은 듯 다른 듯
예전에 만났던 듯 혹은 처음 만난 듯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매 순간 낯선 모습으로 찾아오는 배우가 있다.
한계를 모르는 캐릭터 변신과
무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배우
가슴으로 연기하고 눈빛으로 말을 거는 배우 정재영
그와의 소통이 시작된다
글 _박은정 | 사진 _김재윤
▷ 영화 <글러브>가 개봉하기도 전에 반응이 아주 좋아요.
1월에 가장 기대되는 영화 1위,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 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사실은 감사하지요. 하지만 결과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으니까요.
초반 입소문이 중요한데 <글러브>가 진심이 담긴 좋은 영화라고 보신 분들이 입소문 좀 많이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 이미 <국가대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스포츠 영화들이 큰 감동을 줬는데요.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글러브>만의 특별한 감동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이번 영화는 본격 스포츠 영화이기도 하면서 스포츠를 전면에 내세운 ‘사람’ 이야기예요.
물론 다른 스포츠 영화도 사람 이야기를 다루지만 <글러브>는 특히 게임에서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서 그런 부분이 차별화되는 점이죠.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는 마지막 결과에 환호하고 눈물 흘리는 클라이맥스가 있다면 <글러브>는 경기를 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감동을 주는 영화죠.
▷ 영화 <아는 여자> 이후로 두 번째 야구 선수 역할인데 이번엔 <아는 여자> 때와는 달리
야구 선수로서의 모습을 보여줘야 해서 사전에 훈련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거기다가 이번 작품에 가장 중심을 잡아주는 배우로서 전체를 이끌고 가느라 힘들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개인적인 훈련이라면 콜 볼이라고 해서 야구를 가르칠 때 공을 쳐주는 게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이들하고 같이 3개월 전부터 연습을 했죠! 아이들이 훨씬 더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야구를 전혀 못하는 아이들이라서 숱하게 멍들고 까졌죠. 또 야구부원 친구들이 신인이긴 하지만 전부 연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어요. 훈련도 오랫동안 이 친구들과 하고 야구팀 차로 이동도 같이하면서 자연스럽게 단결력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뭐 일부러 그렇게 같이 으샤! 으샤! 하지 않아도 잘해 낸 것 같아요.
▷ 그럼, <글러브>에서 정재영이란 배우는 어떤 연기를 한 것 같나요?
전 오히려 영화 속 까칠한 김상남으로 살려고 더 애쓰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잖아요. 야구부 아이들은 신인이라 실화에 나온 캐릭터처럼 자연스러울 수 있는데, 저는 전작의 노출이 많았던 배우이다 보니 실화의 존재가 아니라는 게 확 드러나요. 그래서 가장 야구 선수처럼 보이게끔 작품에 어울리고 녹아들 수 있는 연기를 하는 게 중요했어요. 어떤 장르, 어떤 영화냐에 따라서 초점을 두는 게 다를 수 있는데, 이번 영화는 실제 정재영하고 가장 비슷하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죠.
그는 관객을 단 한번도 실망시켰던 적이 없다.
작품 속에서 자신을 지우고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은 연기자
그가 바로 정재영이다
▷ <이끼>를 다 끝내기도 전에 이번 영화 작업을 했다고 들었어요.
<이끼>의 천이장 캐릭터가 워낙 강해서 바로 ‘김상남’의 옷을 입기가 힘들었을 텐데 어떠셨어요?
그래도 촬영하는 데 6개월 정도 공백은 있었어요. 저는 뭐, 작품이 끝나면 캐릭터에 대해서 딱 잊어버려요. 그 인물에 빠져서 여운을 길게 가져가지 않는 편이죠. 그럴 수가 없어요. 인간이라는 게 살인자 역할을 맡았어도 살인마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촬영이 끝나면 정재영으로 돌아와야 되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제가 힘들어서 안 돼요. 촬영장에서 그 인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는 것도 힘든걸요(웃음).
▷ 그강우석 감독님은 인터뷰에서 “다른 감독에게 뺏기고 싶지 않은 배우, 영화를 만드는 자극제가 되는 배우”라고 하셨고, 장진 감독님은 “정재영이 없으면 영화를 관두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재영이란 배우에 대해 믿음도 크고 애착도 많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 감독님의 ‘사단’, ‘페르소나’라는 말들을 하는데 어떠세요?
(쑥스러운 듯) 단지 서로 신뢰하고 마음이 맞으니까 같이하는 거죠. 하지만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제가 두 감독님하고만 일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다른 감독님들은 계속 안 써주시더라고요(웃음). 사실 두 분 다 인연을 한번 맺으면 계속 이어 나가는 스타일이라서 그래요. 강우석 감독님의 경우 세 작품을 함께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워낙 사람을 좋아해서 한번 만난 끈을 잘 안 놓으시려고 해요. 안 그랬다면 아마 그 배역에 맞는 다양한 사람을 찾아서 캐스팅했을 수도 있었겠죠. 최근에 장진 감독님 작품에서 저는 카메오로 나오지만 나머지 배우들은 이전에 출연했던 분들이 많이 나와요. 그래도 장진 감독님 영화는 코미디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나왔던 사람이 또 나와도 관객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는 장점이 있거든요. 두 감독님이 정말 정이 많다 보니 계속 인연을 이어오게 된 건 맞는 것 같아요.
▷ 그럼 두 감독님의 작업 스타일도 비슷한 편인가요?
강 감독님은 촬영이 끝나면 탁 털어버리는 스타일이세요. 끝나면 작품 얘기는 하지도 않고 술만 먹이고 그러는데 대신에 작업할 땐 엄청난 집중력을 가지고 앞만 보고 쭉쭉 달리는 스타일이시죠. 그에 비해 장 감독님은 굉장히 여유롭게 하는 편이에요. <아는 여자>를 찍을 때는 본인이 야구를 좋아하니까 촬영 중에 야구도 하고, 캐치볼도 했어요. 현장 편집도 자신이 직접 해보면서 여유롭게 촬영해요
▷ 많은 분들이 정재영이란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믿음과 신뢰를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연기를 하며 캐릭터에 대한 한계점을 느꼈다거나 힘들었던 적이 있나요?
<이끼>의 천이장 역할을 할 때도 그랬고, 캐릭터에 대한 한계점은 항상 느끼죠! 늘 부족한 것 같고, 그렇다고 방법은 모르니까 고민하다가 촬영이 끝나요. 그래서 감독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아요. 만약에 감독의 연출 없이 나 혼자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면 못 할 거예요. 감독이 오케이를 해주기 때문에 할 수 있고, 안심이 되는 거지, 저더러 오케이 하라고 하면 아마 한 컷 가지고 하루 종일 찍었을 거예요. 이건가 저건가 고민만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감독의 눈이 틀리면 그 영화의 느낌도 틀려지는 거죠. 연기자가 연기를 못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영화가 좋으면 그 연기자가 연기도 잘해 보이는 것 같고, 딱 맞는 것 같고, 변화무쌍한 것 같고 그런 거죠! 물론 배우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감독의 요구를 따라줄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는 게 중요해요.
▷ 그럼 정재영씨는 촬영장에서 감독님의 판단을 많이 따라주는 편이세요?
본인의 의견을 제시할 때도 있지 않나요?
물론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죠. 하지만 제가 아무리 ‘이거다’ 하고 우겨도 감독님을 설득하지 못하면 소용없어요. 제 앞에서는 “아~ 알았어요!” 하더라도 편집할 때 다른 컷으로 끼워 넣으면 그만이잖아요. 강우석 감독님 촬영 때 농담처럼 배우들이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는데” 하니까 “그래, 한 번 더 해라!” 그래요. 한 번 찍고서는 “컷! 이거 잘라서 얘 줘라. 얘가 좋아하는 거니까 개인 소장하게. 나는 별로다!” (웃음)
정말, 한 번 더 해서 “어우, 한 번 더 하길 잘했네.” 그럴 때도 있지만요. 무조건 감독에게 맞춰 준다거나 무조건 배우 얘기를 듣는다거나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 만약에 두 감독님이 동시에 러브콜을 보내온다면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웃음).
그건 뭐, 그때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죠. 누가 더 나에 대한 마음이 절실한가, 살펴야죠(하하). 사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두 분이 워낙 잘 아시니까 그럴 일이 생기지 않게 사전에 얘기가 될 것 같아요.
▷ “<이끼> 천이장 역에 정재영이?” 예전에 <아는 여자> 당시에도 “이나영의 남자가 정재영? 말도 안 돼!” 하며 캐스팅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잖아요. 물론 결과적으로 좋은 반응과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에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스트레스를 받진 않으셨어요?
스트레스까지는 아니고 오히려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처음에 그런 말을 하시는 분들은 작품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게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무작정 이나영씨와 멜로를 한다고 하니까 말랑말랑하고 애틋한 멜로인 줄만 아셨던 거죠. 만약 그런 거라면 감독님이 저를 시켰겠어요?
<이끼>도 마찬가지예요. 만화 <이끼>처럼 똑같이 하려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감독님 영화에 맞는 정재영만의 이장을 만들려고 했거든요. 사실 진짜 나이 드신 분이 천이장 역할을 했다면 젊었을 때 역할을 할 수 없는 거예요. 1인 2역을 했어야 하니까. 그러면 영화 인물의 완성도가 뚝 떨어지거든요. 또 젊은 사람이 나이 든 역할을 하는 건 특수분장에 기댈 수 있지만 70대 노인이 젊은 역할을 하는 건 헐리우드에서도 안 돼요(웃음).
▷ 재미있는 점은 정재영씨가 이나영, 수애, 정려원, 유선씨 등 많은 미녀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멜로라인에 대한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는 않아요.
제가 또 그런 알콩달콩한 멜로라인을 별로 안 좋아해요. 오그라들어서~.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그렇다 보니 멜로작품에 공감이 잘 안 가요. 제가 로맨틱한 삶을 안 살아봤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로맨틱 코미디도 잘 안 봐요. 기본적으로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걸 하려고 연기를 하거든요. 작품도 제가 좋아해야지, 저는 싫은데 누굴 보여주려고 억지로 하는 건 하면서도 기쁘지 않을 것 같아요.
<실미도>의 한상필,
<아는 여자>의 동치성,
<웰컴 투 동막골>의 인민군 장교 리수화,
<이끼>의 천용덕 이장,
그리고 개봉작 <글러브>의 김상남까지
영화 속 필모그래피의 삶이
전부이고 싶은 남자
▷ 정재영씨는 연기 스펙트럼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재영만의 특정 색깔이나 이미지가 딱 떠오르지 않아요. 예를 들어 이병헌씨의 경우 <달콤한 인생>이나 <놈놈놈> 같은 작품을 쭉 이어가면서 이병헌표 악역 연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조금은 정재영표 연기 색깔을 만들고 싶지 않으세요?
음, 이병헌씨 같은 배우는 영화를 자주 안 하잖아요. 다른 모습을 드라마에서 보여주기도 하고, 헐리우드에서 작업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가끔 그런 악역을 계속한다고 해도 질리지가 않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일 년에 꼭 한 편이나 한 편 반씩은 하기 때문에 한 가지 이미지로 쭉 보이면 금방 질려 버려요. 저는 솔직히 사람들이 제가 어떤 배우인지, 정재영이란 이름을 잘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냥 <아는 여자>의
동치성, <이끼>의 천이장으로만 기억해 주셨으면 하죠.
▷ 그래도 관객들이 그 역할을 한 사람이 정재영이었다는 걸 알아봐 주면 더 기분 좋지 않을까요?
그런 부분에 크게 관심이 없어요. 그랬다면 제가 연기를 못했을 거예요. 인간 정재영이 아닌 작품 속 인물로 관객들을 만나는 거니까. 사실 제가 신비주의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보다 지금 저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잖아요. 예를 들어서 처음엔 “저 놈, 진짜 깡패 아니야?” “진짜 그런 사람 아니야?” 하다가 “아! 저 사람 배우구나!” 하고 알아가요. 그리고 좋아하는 배우가 되면 배우 자체에 관심이 가잖아요. 그러다 보면 영화를 제대로 못 봐요. 서서히 그 배우에게 질리게 되죠.
제가 영화를 볼 때도 그래요. 예전에 어렸을 때 ‘그 배우가 너무 좋아서’ 그가 나오는 영화만 집중적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 딱 질리더라고요. 제가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의 영화를 여러 편 연장으로 보니까 특유의 장점이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너무 잘 알게 되니까 더 이상 신선해 보이지가 않은 거죠. 그게 연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일 수도 있어요. 최대한 질리지 않고 신선함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배우의 의무란 생각이 들어요
▷ 작품마다 관객들에게 신선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만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을 텐데요.
뭐, 그런 면에서 제 와이프는 제가 굉장히 신선하죠!(일동 웃음)
<이끼> 할 때는 머리 빡빡 깎고, 골룸처럼 하고 돌아다니다가 집에 가니까 혐오스럽다고 잠을 따로 자자고 하는 거예요. 애들도 저한테 안 오려고 하고요. 캐릭터에 따라서 변하니까 보통 사람들보다는 신선하죠(웃음).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되게 그 영화에 녹아들어서 신선도를 계속 유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신선도에 대한 판단은 관객분들이 냉정하게 하시겠지만요.
▷ 배우로 살면서 어떨 때 희열 같은 걸 느끼세요? 혹시 지난해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인가요?
상 받을 때는 항상 기분이 좋죠. 고맙고요. 하지만 그게 희열은 아니에요. 음, 개인적으로 작품을 잘 만들고, 우리가 의도하는 대로 관객들이 봐줄 때인 것 같아요. 이 장면에서는 웃겠다, 이 장면에서는 뭉클하겠다, 하고 이미지업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게 관객과 통했을 때 가장 희열을 느껴요. 반대로 통하지 않을 때가 가장 안타깝죠.
연극 같은 경우엔 우리가 공연하는 그대로 보여주면 바로 반응이 오기 때문에 그때그때 수정해서 다음 공연을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영화는 다 완성해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수정할 수가 없어요. 그 자리에서 다시 연기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더 고민하면서 해야 하는 게 영화인 것 같아요.
▷ 또 바로 차기 작품 <카운트다운>을 전도연씨랑 준비 중이던데, 여기선 어떤 색깔의 연기를 보여줄 예정이세요?
오늘 고사 지내요. 지금 끝나고 가야 돼요. 채권 추심원 역인데 <글러브>
보다는 어두운 역할이죠. <글러브>에서도 사실 밝은 사람은 아니지만 어둡게 시작해서 애들 때문에 밝아진 캐릭터인데, <카운트다운>
에서는 어둡게 시작해서 어둡게 끝나는 역할이라고 할까요. 영화 자체가 어두운 건 아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루저예요, 루저(하하)!
영화가 흥행한다면 순전히
정재영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재영이 없었다면 그 영화는
흥행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름값에 흥행을 바라거나,
흥행으로 이름값을 올리지 않는
그게 진짜 흥행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