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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se Up! TV

내 이름은 정희연 입니다.

“왜 저 보구 자꾸 아줌마래요. 저는 정희연이에요.” MBC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김명민)가 우여곡절 끝에 떠맡게 된 프로젝트 악단의 첼리스트 정희연(송옥숙)은 놓았던 활을 다시 잡은 김에 수십 년간 잃고 살아온 자신의 이름도 되찾고자 애쓴다. 그러나 정희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마에는 무려 어언 2분의 시간을 할애하며 정희연을 매섭게 닦아 세운다. “정희연이라고 불리고 싶댔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진다는 거예요. (중략) 아줌마 같은 사람을 세상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지금부터 주제 파악을 해볼까요? 따라 해보세요. 똥.덩.어.리.” 물론 며칠 만에 돌아오기는 하지만, 정희연은 강마에의 독설에 백기를 들고 악단을 떠난다. 꿈을 안고 악단에 들어왔건만 ‘똥덩어리’라는 말을 들었으니 기분이 얼마나 처참했을까. 하지만, 사실 정희연은 ‘똥덩어리’란 말 못지않게 강마에가 계속 반복하는 ‘아줌마’ 소리도 불편하지 않았을까 싶다. 비아냥거리는 듯 나직이 깔리는 강마에의 “아줌마”는 언젠가 들어봤음직한 어조이기 때문이다.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뭐라고 해?”

자식 때문에, 남편 때문에 포기하고 살았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고자하는 정희연 씨.

“아줌마, 솥뚜껑 운전이나 하지 왜 다 저녁 때 차는 끌고 돌아다녀”라며 버럭 대는 운전자들, “아줌마 같은 사람들 들어가는 곳 아니야. 어서 나오쇼”라며 눈 흘기는 건물 경비들. 단지 나이 먹은 여자라 해서 이런 굴욕을 당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우리 집 식구들만 해도 “그럼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라는 것이냐?” 묻는다. 그러나 ‘아줌마’라는 호칭이 온당하다면 왜 밥집에서 일 돕는 아줌마들에게 신종 호칭인 ‘이모’가 붙었겠으며 KBS <엄마가 뿔났다>에서 장미희가 도우미 아줌마를 ‘미세스 문’이라 부르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아줌마’는 단순 무식하고 주책바가지인 중년여성들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아줌마’라고 불렷을 때 기분이 가라앉는 건 단지 아줌마라는 말의 뉘앙스 때문은 아닐 게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술의 힘을 빌린 정희연이 강마에를 찾아가는 장면은 이 아줌마의 아픈 곳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정희연이 ”내 꿈을 꺾은 건 바로 당신이야“라고 격렬히 항의하자 강마에는 ”아줌마라 잘 모르시나본데, 일과 사생활은 엄격하게 분리해야 옳다“며 자신은 오직 첼리스트로서의 정희연의 부족함을 지적했을 뿐이라 말하지 않는가. 강마에의 말이 심하긴 했지만, 그의 말은 냉정하게 보면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다. 그저 음대 출신이란 자부심 하나만으로 수십 년간 접었던 연주가 다시 가능하리라 믿었다면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혼자 제 돈 들여 여는 독주회도 아니고 엄연히 오케스트라인지라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하지만 정희연이 그런 ‘아줌마’가 된 것은 자기 인생을 포기했던 그간의 인생 때문이니 그 무력함이 참 애절하다.

아줌마를 응원합니다

정희연 씨가 ‘똥덩어리’라는 폭언에도 꿋꿋하게 맞설 수 있기를.

그래서 나는 앞으로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며 강마에와 강건우(장근석), 혹은 두루미(이지아)의 관계보다 정희연의 이야기를 눈 여겨 보게 될 것 같다. 정희연이 그저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울며불며 하소연만 할 게 아니라 손끝에 피가 맺히도록 연습에 몰입하는 모습 을 보여준다면 이 아줌마도 다시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짧은 시간에 기막힌 연주를 한다는 것이야 턱없겠지만 중년 여성이 갖고 있는 풍부한 감성과 연륜으로 강마에를 잠시 잠깐이라도 놀라게 하길 바란다.

드라마 스토리상 정희연이 그저 똥덩어리가 아니라 연주자로서 부족하지 않다는 걸 강마에가 인정하긴 하겠지만 부디 아줌마라는 처지를 감안해서가 아니라 실력과 근성으로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음을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게 한다면 더욱 좋을테고. 최근 들어 과연 누구 엄마란 호칭 대신 찾은 내 이름에 합당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는데 강마에가 그걸 지휘봉으로 내 머리를 툭툭 치듯 얄밉게 건드렸다. 정희연이 언젠가 강마에에게 ‘아줌마’도 ‘똥덩어리’도 아닌 이름으로 불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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